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단 편집) === 미국의 입장변화와 베트남 전쟁 상황의 악화 === 월남전 초기만 해도 미국은 한국군 파병 제안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월남전 상황이 시궁창으로 흘러가면서 미국의 입장은 달라졌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B. 존슨]]은 베트남에서 베트남 중립화보다는 군사행동 강화를 해결책으로 판단했다. 존슨은 1964년 4월 기자회견에서 동맹국들에 베트남 전쟁 참여를 요청하며 이른바 '더 많은 깃발 정책(more flags campaign)을 표방했다. 결정적으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 의회가 존슨 대통령에게 군사행동 권한을 부여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존슨 대통령의 '더 많은 깃발' 정책은 단순히 병력이 필요하여 추진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여러 국가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선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추진되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파병할 의사가 있음을 피력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적극적인 의사를 보였으나 미국은 거절했다. 하지만 존슨 대통령의 정책으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했고,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번디(William Bundy)가 한국 정부에 비전투부대에 국한된 파병 요청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 9월 한국 정부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남베트남에 파병하는 1차 파병을 추진했다. 이후 남한과 미국 사이의 파병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1964년 12월 19일 브라운 대사는 박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비전투 병력 파병 요청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1965년 3월 2,000명 규모의 공병대 등 비전투 병력을 '비둘기 부대' 명칭으로 파병했다.[* 역사비평 편집 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5] 박정희 정부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 전투부대도 파견하겠다는 제안도 한다.[* 사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초에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번디가 파병 요청을 했을 때부터 전투병 파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1994년 1월 6일 자로 작성된 '월남파병 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 제목의 대통령 비서실 문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마상윤. "''한국군 베트남 파병결정과 국회의 역할''" 국제.지역인구 22, no.2(2013) : 64-66)] 하지만 1964년 말 이전까지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의 확대를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전투병 파견 제의는 마냥 좋지 않았다.[* "미 국무부는 "현재 게릴라전 상황에서 지상군을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입장을 밝혔다.] 베트남에서의 상황은 점점 악화했고, 미국은 급해짐과 함께 한국 정부의 전투부대 파견 제의에 대한 존슨 행정부의 생각도 변했다.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이승만 대통령이 파병 의사를 피력했을 때처럼 국가가 주한미군 어머니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할 틈은 없었다. 1965년 4월 1일과 2일에 열린 국가안보회의연석회에서 미국과 한국군은 15만 병력과 한국군 2만 1,000여 병력을 남베트남에 파병할 것을 결정한다. 1965년 5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는 등 둘 사이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존슨은 당시 한국군의 '''전투병력 1개 사단'''을 파병해 줄 것 요청했다. 당시 한국은 태권도 교관단, 후방시설 건설을 위한 공병대 등 비전투병력은 이미 파견되어 임무 수행 중이었다. 린든 존슨은 1개 사단급의 병력을 우선 증파해달라고 한국에 요청하면서 주한미군과 한국군 유지와 감축 시 협의할 것을 약속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위한 특별지원까지 약속한다.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4-47] 한국 전투부대 파병은 미국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잘 맞물려 이루어진 정책 결정이었다. 한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원했고, 미국은 전쟁 지원을 원했다. 주목할 점은 1차 전투부대 파병 이후 미국은 지속해서 파병을 요청해 왔으며, 이러한 관계는 한국이 '갑'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게 만들었고, 이득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